<환영>이라는 소설을 통해 김이설 작가를 처음 알게 됐다. 가난이라는 소재를 공포스러울 정도로 현실감있게 끌고가는 스토리는 고통스러우면서도 눈길을 뗄 수 없게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에 읽은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라는 소설도 약간 순한맛이긴 하지만 가난한 현실이라는 소재는 비슷했다. 김이설 작가 소설의 특징은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가난과 불행에 치를 떨면서도 미친 가독성으로 중간에 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짧은 소설 안에 인생의 짠맛, 쓴맛, 매운맛이 다 들어있다. 잠시 읽으려고 앉았다가 그 자리에서 소설 한편을 후루룩 읽어버리게 되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 읽게 된 <나쁜 피>라는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이 김이설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이라고 알고있다. 제목에서부터 알싸하고 달큰한 불행의 냄새가 난다. 정신지체자인 어머니를 둔 주인공 ‘화숙’과 그의 주변 가족들의 얽히고 설킨 불행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가난보다는 결핍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화숙은 어릴 때 어머니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어머니를 혐오한다. 어머니는 정신지체자였고 동네 남자들이 여사로 집에 찾아와 성적 노리개로 여기는 여자였다. 아빠없이 태어난 화숙도 그런 과정에서 태어나게 된 아이일 것이었다. 화숙은 정상이 아닌 엄마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외삼촌과 엄마를 범하는 동네 남자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화숙은 외삼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외삼촌의 딸인 동갑사촌 ‘수연’을 괴롭히고 때리는 것으로 분을 푼다. 또 어린 화숙 앞에서 보란듯이 엄마를 범하는 이씨 아저씨에게 분노해 이씨가 외숙모와 바람을 피고 있다고 외삼촌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화숙은 제대로 된 엄마를 가지지 못했다는 결핍 때문인지 언제나 세상에 대해 경계태세를 지니고 살아간다. 자주 사나워지고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을 공경에 빠뜨린다. 그러면서 자신은 태생적인 결핍으로 인해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가지는 보통의 삶은 절대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어버리는 인물이다.
소설의 배경인 천변마을은 화숙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부흥고물상을 주축으로 돌아가는 마을이다. 외삼촌은 마을에서 가장 힘있는 인물이었고 누구도 그의 폭력과 명령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외삼촌은 아내, 딸, 심지어 어머니에게 까지 폭력을 행사하지만 누구도 그를 말리지 조차 못한다. 그 과정에서 외삼촌의 딸 수연은 외삼촌과 화숙 모두에게 각각의 이유로 폭력을 당하면서도 절대 맞서지 않고 가만히 맞거나 먼저 사과해 오히려 더 매를 부추기는 인물이다.
김이설의 소설 주인공들은 가난이나 결핍으로 인해 매 순간 나쁜 선택을 하고 그로인해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추악함이나 삶의 극단을 보게되는 느낌이랄까. 축축하고 자극적이면서 외설적이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구나, 타락이란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거구나를 엄청난 리얼리티를 가지고 다큐처럼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어느 정도 관음증적인 흥미를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다 읽고 나면 삶이란게 뭔지 생각해보게 된다.
왜 불행한 삶은 대를 이어 반복되는가,
왜 가난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까,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란 허상일까,
왜 사람은 나쁜 선택을 반복하는가.
책을 읽으면서 극단의 현실이 담긴 불행을 강도높게 겪고나면 휴우~ 저절로 한숨이 나오면서 책을 덮게 된다. 세상엔 실제로 이런 삶이 존재하겠구나 하는 강도높은 확신과 함께.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을 봤더니 우연인지 몰라도 불행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요즘 밤마다 읽고 있는 <리틀 라이프>도 너무나 강도높은 불행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 읽으면서 온몸이 얼얼한 느낌이 든다. 극단의 리얼리티가 담긴 불행 스토리는 어느 공포소설보다도 소름이 돋는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비교우위적 위안을 얻기도 하고 혹은 남몰래 공감 하기도 하는 것 같다.
김이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꾸준히 읽어보고 싶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삶의 모양이 어떤지 모조리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행복한 가정은 비슷하지만 불행의 모양은 제각각이라던데, 그 모든 제각각의 불행을 천천히 관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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