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은둔자, 캐롤라인 냅

캐롤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사랑스러운 고독

친구를 만나서 수다 떠는 것보다 혼자서 좋아하는 책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쇼핑할 때는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함께 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옆 사람에게 영향 받아서 어영부영 아무거나 사게 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

다행히 남편은 나에게 타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신경쓰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면서 하루종일 보낼 수 있기에 나는 종종 남편과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도 ‘혼자서’ 하루종일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함께 하면서도 서로의 고독을 허락하고, 떨어져있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그런 관계의 동반자가 옆에 있음을 참으로 다행이라 느낀다.

혼자 있는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명랑한 은둔자 p.24~25

한때 아무도 쉽게 못 찾아오는 곳에 은둔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무서웠고 세상 앞에 더이상 나서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어느 한적한 시골에 숨어서 하루종일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으면서 살면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 생각이 조금 바꼈다. 은둔하기에는 오히려 도시가 제격이며,(익명으로 많은 것을 누리는 자유) 내가 시골에 숨어살고자 했던 욕망은 고독보다는 고립을 추구함에 가까웠음을 깨달았다(말이 좋아 은둔이지 도망과 다를 바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물론 중요하지만 고독과 고립은 분간해야 한다는 것.

고독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독은 기분 좋은 메시지를 속삭이며 우리를 달랜다. ‘여기 앉아, 긴장 풀어, 정신없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렴. 넌 그래도 돼.’

그러나 고립은 고독의 사악한 쌍둥이, 아니면 못된 친척이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넌 바깥세상을 제대로 다룰 수 없어. 넌 무능하고, 열등하고, 달라. 맨날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것도 당연하지.’ (…)

바깥 세상은 무섭고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느낌, 다른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도록 허락하면 그들이 반드시 나를 실망시키거나 다치게 할 것이라는 확신, 스스로가 취약해지는 것이 너무 싫다는 생각. 이것은 모두 지극히 인간적인 두려움들이고, 더구나 지극히 강력한 두려움들이라,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기 시작하면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p.20~21

<명랑한 은둔자 The merry recluse>라는 제목은 한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명랑과 은둔이라는 단어의 낯선 조합, 그리고 즐겁게 혼자있기를 택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궁금했다. 저자 캐롤라인 냅는 2002년에 4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이 글들은 저자가 생전에 다양한 매체에 썼던 칼럼들을 모은 모음집이다. 대부분의 글은 1990년대에 쓰였다. 글이 쓰인지 20년도 넘었지만 최근에 쓰인 글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그녀의 생각은 대체로 트렌디했다.

특히 저자는 젊은 시절 거식증과 알콜중독을 심하게 겪었는데 그 과정과 상태를 아주 세세하게 알려주고 그때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분석해서 글로 표현해놓았다. 아주 명쾌하다. 그 과정을 더 자세히 담은 책이 <드링킹, 그 치명적인 유혹>과 <욕구들>이라는 책으로 나와있지만, 이 책에 담긴 칼럼으로도 충분히 맛보기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거식증이나 알콜에 중독되는 이유나 매커니즘을 아주 자세히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저자는 젊은 시절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적어지고 불안해지자 자신이 먹는 음식과 자신의 몸무게 등 눈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통제하면서 성취감을 느꼈다고 한다. 무언가를 먹는 것(자신을 통제하기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깡마른 몸은 38킬로그램까지 줄어들었으며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거식증을 속이려고 이런저런 거짓말을 했다. 거식증이 날씬함에 대한 욕구 외에도 무언가를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온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새로웠다.

그녀는 어느 순간 심한 알콜 중독에도 빠졌었음을 고백했는데 알콜 중독의 무서운 점은 가랑비에 옷젖듯 천천히 스며든다는것이다. 그저 기분이 좋아서 한 잔씩 먹었을 뿐인데 어느순간 술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콜 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기분을 똑바로 마주하기 두렵기 때문이다. 술을 한 잔 마셨을 때의 알딸딸한 기분은 현재의 나를 잊게 만들어준다. 그 순간의 분노, 슬픔, 어색함, 걱정등을 날려주니 쉽게 의지하고 싶다.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진 않지만 술을 마셨을 때의 그 가볍게 들뜨는 기분과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한다. 특히 마음이 괴로울 땐 더 쉽게 그런 나른하고 가벼운 기분으로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알콜 중독자들이 처음 술을 끊으면 맨정신으로 맞이하는 기분과 상황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마치 사람들 앞에 나체로 서있는 것처럼 어찌할바를 모르겠는 상태인데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 기분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술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어떤 기분이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저자 캐롤라인 냅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수줍음이 많지만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과 경험을 기꺼이 세상 사람들에게 아주 정확한 언어로 분석해서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선 그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낀다. 남다른 완벽주의 성향과 수줍음이 겹쳐서 젊은 시절부터 각종 중독 증상으로 힘든 일들을 겪었지만 그녀의 경험은 오롯이 아주 정확한 텍스트가 되어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나도 그녀처럼 용기있고 정확한 언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내밀한 경험, 세상에 대한 다양하고 깨어있는 생각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너무나 사랑스러운 책이다.

특히나 책의 표지에 그려진 그림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든다.

<Taking it all in> – Karen Offu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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