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 앞에 앉는다. 앉아서 하얀 새 창을 띄우자 마자 내 머릿속은 또다시 새하얀 도화지 상태가 된다. 뭘 써야하지? 그보다는 뭘쓰면 사람들이 봐줄까? 그 글로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순수하게 쓰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 이것저것 따지다보면 금새 세상에 쓸만한 글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써버린 것 같고, 나는 글 쓸 소재가 완전히 고갈된 사람처럼 멍해진다.
글쓸 때의 내가 순진하지 않다는 뜻이다. 쓰고 싶은 걸 쓰는 것이 아니라 그 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따지고 생각하다보니 글쓰기가 너무나 재미없어졌다.
무슨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해?
박연준의 <쓰는 기분>
박연준 시인의 <쓰는 기분>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읽었다.
글을 쓸 땐 무언가를 바라지 말고 순진한 마음으로 써야 한다. 등단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쓰는 것이 좋아서, 거기에 미쳐서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신춘문예에 던지듯 내보는거다. 자기의 글쓰기에 미쳐서 자신을 갈고 닦은 사람은 때가 되면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빛이 밖으로 새어나오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글쓰기가 목적이 아니라 그걸로 유명해지거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면 그때부터 글쓰기는 아주 재미없는 의무처럼 되어버린다. 기준이 ‘내가 쓰고싶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봐줄지’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것이 요즘 내가 글쓰기를 짐처럼 느끼고 재미없어 하는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물론 작가라면 응당 다른 사람이 봐줄만한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쓰고 싶은 글이라는 전제가 지켜진 후에 생각할 문제다. 쓰기도 싫은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은 억지로 쓰는 반성문과 다를바 없으니까.
<쓰는 기분>은 에세이처럼 아름답게 쓰인 글쓰기 실용서다. 작가가 시인이라서 그런지 무언가 설명하기 위해 쓰인 내용도 리듬감 있는 아름다운 시처럼 쓰여있다. 글을 이렇게 쓰면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관심없던 시집을 읽고 싶고, 심지어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글이었다. 특히 책의 서문부터 마음에 들었다.
쓸 때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내가 아니면서 온통 나인 것, 온통 나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나인 것.
쓸 때 나는 기분이 전부인 상태가 된다.
현실에서 만질 수 없는 ‘나’들을 모아 종이 위에 심어두는 기분.
심어둔 ‘나’는 공기와 흙, 당신의 눈길을 받고 자랄 것이다.
내가 나 아닌 곳에서 자라다니!쓸 때 나는 나를 사용한다.
박연준, <쓰는 기분> 서문 중에서
나를 사용해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그건 나를 분사해, 허공에서 입자로 날아가는 기분.
나를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러 가는 기분.
나를 비처럼 맞은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살피러 가는 기분.
입자로 떠돌며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의 눈에 읽힐 때를 상상하는 짜릿한 글이다. 나를 종이 위에 심어 당신의 눈길을 받고 자라나게 하고, 내가 입자가 되어 당신에게 날아가는 기분. 이건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글에 나만의 생각과 영혼이 담겨있어야 그 짜릿함은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의 진가를 알아봐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중과 가장 가까운 글쓰기 ‘작사’
글을 써서 대중의 가장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작사’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아이유의 작사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의 다음 노래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가 있을까가 음악보다 더 큰 관심사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뮤지션이다. 음악만으로 억만장자가 된 첫번째 가수라고 한다. 그의 노래가 사랑받는 이유도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에 그녀의 생각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들의 생각을 궁금해하고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한다.
얼마전 가수 김세정이 몇년전부터 꾸준히 직접 전곡 작사에 참여한 앨범을 꾸준히 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유와 김이나가 그 가사를 보고 너무 잘 썼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니 가사가 꽤나 아름답고 흥미롭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배우 생활에 비해 음반은 생각보다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가 갈고닦은 실력과 때가 맞는 순간이 온다면 바깥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일단 나는 내가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컨텐츠를 만들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쓸 때 나 자신이 행복하고 재밌는지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그 길로 가서 계속 실력을 연마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아주 매력적이고 재밌는 글을 써서 입자처럼 분사되어 사람들에게 흠뻑 뒤집어씌우고 싶다. 그럴려면 우선은 쓰는 기분을 알아야 한다. 글쓰기에 미쳐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순진함을 장착한 열정이 필요하다.
희망은 문이 아니라 어느 지점엔가 문이 있으리라는 감각, 길을 발견하거나 그 길을 따라가보기 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가 있으리라는 감각이다.
리베카 솔닛 ,<어둠속의 희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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