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단편 <변희봉> 틀린건 세상일까, 나일까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는듯한 기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몇 년전의 일이다. 진라면에는 매운맛, 순한맛이 있는데 나는 그 중 중간맛을 즐겨먹었다. 라면이 떨어진 어느날 진라면 중간맛을 구매하려고 쇼핑몰 검색을 했는데 매운맛, 순한맛만 가득하고 중간맛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검색을 해도 중간맛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전혀 흔적이 없었다. 내가 매일 먹던 진라면 중간맛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거였나?

근데 이게 나만의 착각일 수는 없는 것이 남편도 분명 진라면 중간맛을 같이 먹었고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라면 봉지는 이미 오래전에 버려버린 후라 증명할 방법도 없고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것 같았다. 중간맛은 잠시 생겼다 사라진걸까, 나만의 착각일까, 세상이 작정하고 나를 속이는 걸까.

이장욱의 <변희봉>
세상이 나를 작정하고 속이는 것인가, 시간의 틈이 엇갈린 것인가.

소설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례를 보게 되서 신기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읽었다. 제 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이장욱 작가의 단편소설 <변희봉>이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변희봉 배우의 오랜 팬인 주인공 만기는 어느날 길을 걷다가 배우 변희봉을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상하게 삶의 곳곳에서 변희봉을 마주친다. 재래시장의 생선장수로, 친구 결혼식의 사회자로 자꾸 그 유명배우를 마주치게 되는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의 친구, 가족 그 누구도 변희봉이라는 배우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괴물>에 변희봉 배우가 출연한 사실을 알려줘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 배우는 장항선, 김인문 배우로 바껴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변희봉이라는 배우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내 머리가 어떻게 된거란 말인가. 만기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배우 변희봉
변희봉 배우, 그는 실재하는 유명 배우다.

변희봉 배우는 실제로 존재하는 배우다. 소설 곳곳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야구팀, 배우들 이름을 등장시켜 현실감을 주면서 동시에 딱 한가지 사실만 비틀어 전혀 다른 세상인 것 같은 효과를 낸다. 모든 것이 똑같지만 내가 아는 배우 변희봉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나만 아는 무언가가 쏙 빠져버린 세계, 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일까.

하지만 이 사실마저 비틀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신경망이 손상되어 병원에 입원해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내뱉은 말 때문이다.

“만기야…니…밴…희봉이라고… 아나?”

아니, 그럼 이것이 만기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단 것인가. 아버지와 만기가 함께 좋아했던 배우 변희봉, 그 존재는 그들의 기억속에서 만큼은 실존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종종 생긴다. 공사중인 운동장에서 난데없이 날아온 야구공, 야구 경기중 날아간 야구공이 순간 사라져 아무도 찾지 못하게 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이 소설이 쓰일 당시에만 해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변희봉 배우는 작년 2023년 9월에 췌장암으로 별세하신걸로 나온다. 이제는 변희봉이라는 인물이 진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물론 그에 대한 우리의 기억과 작품은 곳곳에 남아있지만 말이다.

소설의 해설 부분에 강동호 평론가가 쓴 첫문장이 이 소설을 그대로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가져와서 적어본다.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굳건하게 믿고 있던 하나의 진실이 온전히 망념에 불과하다는 판정이내려져, 그간 축적해온 삶의 집념이 급격하게 와해되는 순간 말이다. 웬만하면 이 어그러진 생활의 편린들을 추스르고 다시 일상의 궤도에 오를 수도 있으련만, 여전히 그 진실 아닌 진실이 자신의 삶을 이꿀어줄 단 하나의 부표라 완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네의 삶은 소망과 현실 사이의 헛갈림으로 정처없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그것을 세상 사람 모두가 부정한다면 그것은 내가 잘못한걸까, 세상이 잘못한걸까. 그 모든 것은 무효인 것인가. 나는 종종 평행우주의 다른 차원에 틈이 생겨 생긴 일이라고 상상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귀신을 보는 사람들은 실은 뭔가 다른 차원의 무언가가 보이는 것이 아닐지.

실체없는 기억이란 이토록 무섭다. 내가 아무리 오래도록 생각했어도 증거나 실체가 없으면 무효가 되버리니까. 세상은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것 투성이다. 실은 모두가 트루먼 쇼 처럼 일생을 속으면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만의 변희봉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