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단편소설 분석 – 1F/B1(일층, 지하일층)
건물주와 건물 관리인들의 이야기. 피식 웃게되는 농담같은 설정 속에 실은 잘 벼려진 칼이 숨어있다.
- 2010년 제 1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소설에는 건물주이자 건물 관리에 진심인 구현성이라는 인물과 다양한 건물관리자들이 등장한다. 1인자인 구현성을 중심으로 건물관리 기술자로 잔뼈가 굵은 2인자 이문조, 홈세이프 건물의 새로운 건물관리자로 부임한 윤정우, 얄밉지만 은근 맞는 소리를 하는 오데옹 빌딩 건물관리자 조천웅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구현성은 <지하에서 옥상까지>라는 건물관리 관련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그 책은 전국 건물관리인들의 필독서가 된다. 구현성은 네오타운 동네의 50개 건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비밀통로를 만들어 그 중앙에 모든 건물 관리인들이 모일 수 있는 비밀 관리실이라는 커다란 숨은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인물이다. 사람들이 건물 관리에 관심 없는 틈을 타 그 동네 건물 관리의 중앙집중화를 이룬다.
어느 날 네오타운의 모든 빌딩에 갑작스러운 정전이 찾아오고 건물 관리인들은 그 원인을 찾아나선다.
정전의 원인을 찾기 위해 어둠속에서 계단을 오가던 건물 관리자 윤정우는 문득 정전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1F/B1 비상등을 보게된다. 언뜻보면 FBI라는 글자를 연상시키는 이 표식은 윤정우를 사로잡는데.. 이 모든 정전의 배후는 누구일까, 누구의 음모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건물주 구현성은 건물관리에 진심이라 대부분의 시간을 건물 지하 관리실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자신이 편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는 자기 건물의 꼭대기층에 간다. 그곳에서는 네오타운의 모든 건물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사실 이 정전사태의 원인을 구현성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이 구역의 재개발을 원하는 세력이 구현성이 가진 중앙집중식 관리시스템을 잠시 빌려 정전으로 공포심을 조장해 이 지역의 건물 가치를 떨어뜨리고 그걸 재개발에 이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재개발이 되면 떨어질 수 있는 콩고물을 바라고 그는 하루 24시간의 관리권한을 그 세력에게 넘긴 것이다.
1F/B1에서 슬래시(/)의 역할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1F/B1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 사이의 슬래시(/)라고 할 수 있다. 슬래시는 강력하게 위와 아래를 구분한다. 1인자인 건물주 구현성과 2인자인 건물 관리인 이문조는 절대 비슷한 존재가 아니다. 슬래시로 강력하게 구분될 수 밖에 없는 계급차이인 것이다. 슬래시는 계급을 구분짓고 절대 넘어올 수 없게 만드는 벽과도 같다. 건물 관리인은 어쩌면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의 구분선을 지키는 사람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들은 꼭 필요하다.
소설에서 윤정우는 건물관리인인 자기들을 SM 즉 slash manager라고 명명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는 그 표지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슬래시 기호(/)를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가 딱 저렇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층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끼어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슬래시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미미한 존재들이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현실에 순응하는 듯한 윤정우의 말에 촌철살인처럼 늘어놓은 조천웅의 말이 사실은 숨겨놓은 칼같은 말이다.
“그거는요. 그냥 1층 위에 2층 있고, 2층 위에 3층 있다는 표시거든요.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슬래시 아무 데나 쭉쭉 그어놓으면 큰일나거든요.”
세상은 피라미드처럼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세상은 그런 식이다. 슬래시는 위아래를 구분함과 동시에 같은 계층의 사람들도 종류별로 구분할 수 있다. 아무 데나 쭉쭉 그으면 편견과 차별의 기준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슬래시는 편리한 구분자이면서 딱딱한 벽이다. 또한 slash라는 영어 단어에는 ‘깊이 베다, 채찍으로 갈기다’라는 뜻도 담겨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어쩌면 <일층, 지하일층>보다는 <슬래시>가 더 맞는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윤정우가 기거하는 지하 관리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 살아본 사람은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곳에 있으면 한마디로 우주의 끝까지 내몰린 기분이다. 윤정우는 문을 열어놓은 채 잠들고 싶었지만 기계 소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끄면 사방이 우주의 귀퉁이처럼 깜깜하고, 문너머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배수관의 물 흐르는 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려온다. 우주 전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방이라는 작은 세계의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네 개의 벽이 방을 둘러싸고 있지만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때, 그 벽은 무의미해진다. 벽이 사라지면 우주 전체가 너무 크게 느껴지고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몸이 수축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 때문인지 윤정우는 어두운 방에서 자신이 점점 줄어들어 작은 모래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구현성은 건물 관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건물 관리인들이 머무는 지하 관리실은 창문 하나없는 3평짜리 감옥, 빛 하나 없는 우주의 귀퉁이처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중앙의 비밀관리실과 이어지는 작은 통로로 숨구멍은 열어두었다. 소설 속 윤정우는 자신이 기꺼이 층 사이에 끼인 슬래시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시스템에서 하나의 부품이 된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슬래시(/) 하나로 계급, 벽, 음모 다양한 농담과 계략을 섞은 소설이라 흥미롭다. 유쾌하고 농담섞인 이야기 속에 칼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독자만이 이야기 속에 숨은 서늘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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