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비행운 단편소설집

김애란 <비행운> 리뷰 – 지금이라도 이 소설집을 만난건 행운이야

김애란의 비행운 – 단편소설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어?

반짝이는 문장으로 만들어진 지독하게 세밀한 단편영화를 여러편 본 느낌이다. 지독하게 운이 없는, 비루하고 부끄럽고 축축한 인생들이 마치 내옆에서 리얼타임 영화처럼 펼쳐졌다. 솔직하고 리얼한 감정표현과 묘사들이 가끔 내 실제 경험과 겹쳐지면서 PTSD가 올 것 같은 느낌도 종종 들었다.

10대 사춘기 소년부터 20~30대 여자, 40대 아저씨, 50대 아줌마 까지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는데 왜인지 모두 나의 일부분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김애란 작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디테일하게 관찰하는 것일까.

새삼 단편소설 읽는 맛을 제대로 느꼈던 소설집이다. 맛있는 초콜릿이 정갈하게 들어있는 상자에서(단편집) 신중하게 하나를 골라 베어물었더니 그 안에는 또 예상치 못하게 아몬드나 젤리처럼 입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재밌는 문장들)이 추가로 들어있는 느낌이다.

신선한 묘사로 읽는 즐거움

단편 하나하나가 모두 비루하고 축축한 이야기를 담고있는데, 이상하게 ‘어둠속에서 알전구를 씹어먹는 것처럼’(p.124 <물속 골리앗> 문장 중에서) 머릿속과 정신은 환희로 가득차는 느낌이다. 이 장면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새삼 우리말이 아름답고 흥미롭구나 느끼면서.

지금도 나는 그때 물 속에서 느낀 아주 기이한 고요를 기억하고 있다. 가까스로 물밖에 머리를 디밀었을 때 매미 소리가 무척 시끄럽게 들려왔던 것도.

p.41 <너의 여름은 어떠니> 중에서

주인공 미영이 친구들과 놀다가 물에 빠졌을 때 느꼈던 장면을 표현한 문장이다. 내가 물에 빠진걸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혼자 물속에서 떴다 가라 앉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도 나의 부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내 귀에는 물속의 무서운 고요와 물밖의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번갈아가면서 들린다.

별거 아닌 묘사 같지만 한 여름에 친구들 곁에서 실제로 혼자 물속에 빠져있는 듯한 공감각을 느끼게 한다. 나의 부재와 상관없이 여전히 활기차게 울며 여름 분위기를 돋아주는 매미 소리가.

소설 <벌레들>에서 주인공이 집안 곳곳에서 나오는 벌레들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은 또 어떠한가. 넓고 환하다며 잘 골랐다고 들어간 전셋집에서는 매일 온갖 벌레들이 기어나오고 바로 옆 재개발 지역에선 하루종일 공사소리가 들리고 먼지가 날린다.

벌레가 많았던 집에서 살았던 예전 기억이 PTSD를 일으킬 것 같았다.

작가가 커다란 나무를 묘사하는 특이한 방식도 독특하고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 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p. 79 <벌레들>
큰 나무

나는 허둥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저기, 아랫도리를 벌린 채 멀어져가는 정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복잡하게 얽힌 뿌리 사이에 단단히 붙박여 있었다. (…)
어머니는 물살을 따라 애드벌룬처럼 둥싱둥실 먼 곳으로 흘러갔다. 녹색 테이프로 둘둘 감긴 얼굴이 이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정자나무는 걱정 말라는 듯, 마치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신처럼 단단한 뿌리로 어머니를 감싸 안은 채 저 끝으로 사라졌다.

p. 116 <물속 골리앗>

재개발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나무를 쓰러뜨려 놓은 모습을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표현한 장면(벌레들), 집앞에 심어져 있던 큰 나무가 뿌리째 홍수로 떠내려와 죽은 어머니를 감고 사라지는 모습을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신’이라고 표현한 문장(물 속 골리앗)은 기발하면서도 신선했다.

PTSD를 일으킬 것 같은 디테일한 심리묘사

특히 심정적인 부분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소설은 <큐티클>이었다. 20대인 어느날의 나를 도촬당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결혼식날이지만 대학동기들에게 최대한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사회 초년생 여성의 어설프고 웃프고 끈적한 하루.

잘나가는 선배 언니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네일샵에서 손톱은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었지만 겨땀은 어찌하지 못했던 주인공의 주책맞은 하루.

그녀는 예쁘게 하고 나온김에 친구를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친구가 알바한다는 남산타워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지만 사은품으로 고급 캐리어를 준다는 길거리 마케팅에 혹해서 신용카드를 만든다. 더운날 땀을 쭉쭉 흘리며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9cm 힐을 신고 결혼식에서 받은 부케까지 들고 낑낑대며 남산의 계단을 올라가는 주인공의 하루는 웃프고 비루해서 더더욱 우리 삶 같았다. 읽던 나도 겨땀이 나는 느낌.

마지막 단편이었던 <서른>은 열심히 살았지만 어쩌다보니 다단계 사업에 빠져 사람과 돈과 많은 것을 잃고 서른을 맞은 주인공의 고해성사와 같은 편지글이다. 다단계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사는지에 대한 참상은 공포스러웠다. 그런 말도 안되는 희망도 믿고 싶을만큼 희망이 결여된 젊은 세대의 비애가 안타까웠다. 나의 20대에도 그런 희망을 믿고 싶었던 때가 있었기에 더더욱 안타깝고 슬펐다.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p.297 <서른>

여기서 ‘겨우 내가 되겠지’ 이 문장은 다른 글이나 노래에서도 많이 인용된 것 같다. 문문(MoonMoon)이라는 가수는 ‘비행운’이라는 노래에서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 뿔이 자라난 어른이 될테니’라는 가사를 썼다.

아이유의 노래 중 ‘아이와 나의 바다’ 라는 노래의 가사에서도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소설집에서 영향을 받은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같은 소설을 읽은 것 같다는 생각에 뿌듯한 동질감이 더 생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과 역경을 겪는 비천하고 슬픈 보통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하게 빛나는 묘사덕분에 충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김애란의 <비행운>은 지금까지 읽은 단편소설집 중에서 모든 단편이 다 좋았던 손에 꼽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내가 왜 이 소설을 왜 이제야 꺼내서 읽었을까. 출간된지 10년도 넘은 소설을 이제야 꺼내 읽은건 비(非)행운이지만, 그동안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지금 이 시기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아주 큰 행운이었다.

소설은 왜 읽는걸까? 위대한 책이 우리 삶에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