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의 스텔라 오딧세이 트릴로지 시리즈가 나오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김보영 작가는 지인이자 팬인 한 남자의 부탁으로 세상에서 딱 두 사람만을 위한 프로포즈용 로맨스 SF소설을 쓴다. 삼부작의 1,2부인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당신에게 가고있어>는 각각 남자, 여자의 관점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찾으면서 각자에게 쓴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이 이야기는 기존에 먼저 쓰인 소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의 주인공 성하의 부모님 이야기가 되었다. 기존 소설의 프리퀄격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삼부작 형식을 띄고 있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1,2부와 3부는 별개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완결작이므로 굳이 프리컬 이야기를 읽지 않고 보더라도 이야기를 즐기는데는 문제가 없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는 가는데만 4.6광년이 걸리는 알파 센타우리에 다녀올 예정이고 남자는 지구 주변을 광속으로 돌면서 여자가 돌아오는 시간과 맞추기로 했다. 남자가 두달간 지구 주변을 돌며 광속 항해를 하는 동안 지구시간으로는 4년 6개월이 흘러갈 예정이다. 하지만 결혼식장도 잡아놓고 친구들도 다 초대해놨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약속 시간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엇갈리는 두 사람이 오직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계속 기다리고 찾아가는 내용이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프로포즈때 사용할 낭독용으로 쓰여진 소설이라 사실 세부적인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읽으면서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한건지 이해하는 것이 쉽진 않았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
첫번째 이야기에서 풀리지 못한 의문점들은 두번째 여자 입장에서 쓰인 편지글 <당신에게 가고 있어> 에서 많은 부분 해결된다.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상황 때문에 잠시 헤어져있게 되었고, 어떤 연유로 시간과 공간이 엇갈려 너무나 오랜시간동안 서로를 찾아 헤매게 된 건지.
그리고 그안에서 찰나의 차이로 서로 엇갈리며 지나가는 순간을 알 수 있다. 이건 꼭 두 권을 같이 두고 날짜를 비교해가면서 봐야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남자가 혼자 겪었던 고독한 외로움, 여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고립되면서 겪는 외로움, 각자는 서로 다른 외로움과 고난을 안고 상대방을 향해 달려간다. 둘이 서로를 찾아 헤매는 와중에 배경에서는 지구가 종말을 맞게 되는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런 거대한 설정들이 아득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미래로 가는 사람들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경이로운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얇고 작은 책에 이렇게 넓고 깊은 얘기를 담은거지. SF의 거장 아서 C.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과 정신이 잠깐 지구를 벗어나 우주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느낌, 아득한 우주 어딘가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1,2부 이야기의 주인공인 커플의 아들인 ‘성하’의 이야기다. 성하는 광속 우주선을 타고 시간을 여행하는 시간여행자가 되었다. 지구의 수많은 문명은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생겨나고 종말하기를 반복하면서 비슷한 역사를 반복한다. 원시인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개척하다가 어느새 종말하고 또 오랜 세월에 걸쳐 다시 태어나고 번성하는 것이다. 성하는 광속 여행을 하며 이런 문명을 수없이 접하며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사람이다.
책에서 나온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가설은 이거였다.
“수십억 광년 밖의 우주는, 사실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입체 영상이란 이야기야.”
청년은 한참동안 셀레네를 마주보았다.“자, 봐라. 여기 원 위에 사람이 하나 산다고 생각해봐라. 그리고 빛이 공 위를 회전한다고 생각해 봐. 그럼, 네가 망원경으로 저쪽을 보게 되면 망원경은 지면을 한바퀴 돌아서 바로 네 뒤통수를 비추게 될 거다.”
미래로 가는 사람들 p.40~41
셀레네는 공 위에 사람 하나를 간단히 그리고, 공 바깥쪽에 점선의 원을 하나 그렸다.
“물론 그게 너라는 것은 결코 알 수 없지. 망원경에 비치는 건 어린 아기일 테니까. 빛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그곳이 우리 자신의 영상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으니까. 별과 은하는 물론이고, 성간 구성 물질, 분자와 원자 하나하나까지 같은 것이 없을 테니까. 그런 것을 같은 공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50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이 태양계를 본다면 어떤 모양이겠어? 아무리 배율이 높은 망원경으로 보아도 관측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태양 뿐이다. 하지만 50억 년 전의 태양계에는 태양조차 없었어. 지구는 말할 것도 없지. 직접 날아가서 보려고 해도, 도착했을 때는 다시 50억 년이 지나 버리니까. 그 자리에 있는 건 항성이 폭발하고 남은 먼지 구름, 아니면 블랙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계야. 100억 년의 변화를 계산할 수 있는 기준은 없어. 우주의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이 우주는 무한한 거다.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봤자,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우주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거울 같은거라고 보면 돼. 수십만 개의 거울이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거야. 우주가 멀어질수록 조밀해지는 이유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빛이 비추는 영상이 늘어나기 때문이야.”
빛은 일정한 곡률로 움직이는데 그것이 계속 움직이다보면 결국 돌고 돌아 원을 그리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국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우주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빛이 돌고 돌아 우리의 과거, 즉 어린 우리의 뒤통수를 비추기 때문이라는거다. 이런 신선한 생각이라니.
또 우리가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광속에 도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광속에 가까운 속도가 아니라 정확히 광속과 똑같은 속도에 도달하게 된다면?
“광속에 도달하면 시간이 완전히 정지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감속할 수 없어요. 설령 100만분의 1초 뒤에 감속하려 해도, 그땐 이미 영원의 시간이 지난 뒤니까. 아니, 영원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100만분의 1초라는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자동 프로그램을 입력해도 소용없어요. 컴퓨터의 시계 역시 정지하니까. 영원히, 우주의 종말이 올 때까지 여행하다가 이 우주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겠지요. 물론 우리에겐 한순간에 죽음이 찾아온 것과 동일하게 느껴질 겁니다. 느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미래로 가는 사람들 p.144~145
빛의 속도로 움직이면 시간이 정지한다. 그리고 그 순간 영원의 시간이 흐를 것이고 우주의 종말이 오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당사자에겐 시간이 멈췄으므로. 그것은 곧 죽음과 같은 상태인 것이다.
그 외에도 우주만큼 큰 스케일에서 상상할 수있는 많은 것들, 신의 존재, 죽음, 우주의 끝에 관한 다양한 호기심을 흥미롭게 풀어놓은 부분이 많다. 김보영작가의 SF소설은 늘 놀라움을 안겨준다. 세상을 뒤집어서 생각하는 눈, 전혀 다른 관점과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좋은 SF는 그런 일을 해낸다.
참고로 김보영 작가의 다른 소설 <종의 기원담>과 <다섯번째 감각>단편집도 너무 재밌게 읽었다.
PS. 김보영 작가의 소설을 선물받은 커플은 결혼 후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실제로 ‘성하’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소설같은 이야기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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